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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의 시작

역사적 암흑기의 시작

문혁은 역사학계에서 먼저 불이 붙었고, 1965년 11월 10일 야오원위안(姚文元, 1931〜2005)의 『문회보(文匯報)』에 게재된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評新編歷史劇〈海瑞罷官〉)」으로 상징된다.

1967년 4월 어느 깊은 밤에 홍위병이 우한(吳晗)의 집에 들이닥쳐서 무차별적으로 구타했다. 양녀 샤오옌(小彦)은 당시 12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양자 우장(吳彰)은 8살, 1학년이었다. 우한은 강제로 노동개조장에 넣어졌고, 비판투쟁 대회에 끌려 다녔다. 우창은 뒷날 군중이 아버지의 목구멍에 뜨거운 모래를 쑤셔넣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우한은 비판투쟁 대회에서 구타로 가슴을 다쳐서 각혈하기 시작했지만, 1968년 3월에 체포되어 수감됐다. 그의 부인 위안전(袁震)도 4월에 노동개조장에 보내졌다. 그곳에 간지 오래지 않아 본시 병약했던 위안전은 구타로 반신불수가 됐고 1969년 3월 18일 사망했다. 우한은 1969년 10월 11일 야오원위안의 글이 발표된 지 꼬박 4년 만에 눈을 감았다. 샤오옌은 ‘수장의 안전에 영향을 준다(影響首長安全)’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수감됐다. 그녀는 옥중에서 구타를 당해 앞니가 부러지고 이마에 깊은 흉터가 남았다. 1976년 9월 23일 고통을 견디지 못한 샤오옌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문혁의 전개과정

홍위병, 모범극, 사인방, 지식청년, 상산하향

〈해서파관〉을 쓴 우한 일가가 겪은 일은 문혁 10년 세월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이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문혁’ 하면 구술(口述), 홍위병(紅衛兵), 혁명의 8월(紅八月), “혁명은 죄가 없고 저항에는 이유가 있다(革命無罪, 造反有理!)”, 모범극(樣板戱), 사인방(四人幇), 지식청년(知識靑年), 상산하향(上山下鄕), 외양간(牛棚), 비판투쟁(批鬪), 온갖 잡귀신(牛鬼蛇神) 같은 어휘들을 떠올리게 된다. 마오쩌둥은 1966년 8월 5일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炮打司令部——我的一張大字報)」를 써서 홍위병들을 부추겨 류사오치(劉少奇, 1898〜1969) 등을 몰락시켰다. 지식청년의 상산하향운동에 이어, 1971년 9월 13일 린뱌오(林彪, 1907〜1971) 비행기 추락사건이 발생했고, 1974년 신년 벽두부터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 전국적으로 전개됐다. 1976년은 중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해이기도 하다. 1월 8일 국무원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사망했고, 청명인 4월 4일을 전후하여 톈안먼광장은 백만 시민의 애도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뒷날 ‘베이징의 봄바람’으로 표현함) 이 사건이 ‘문혁’의 종곡을 재촉했다면, 7월 6일에는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 창군의 한 사람인 주더(朱德, 1886〜1976)가 사망했고, 7월 28일에는 허베이(河北) 탕산(唐山)‧펑난(豊南) 지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9월 9일에는 마오쩌둥이 사망했고, 10월 6일 저녁에 사인방이 체포됐다. 1977년 7월에 사인방의 당적은 제명됐다. 1981년 6월의 「역사결의」는 ‘문혁’ 10년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 문건이다.

문혁박물관

문혁의 과오에 대한 역사적 반성?

20세기 초엽에 태어나서 몸으로 질곡의 한 세기를 살아온 작가 바진(巴金, 1904〜2005)이 『수상록(隨想錄)』에서 ‘문혁박물관’의 건립을 제안했다. 문학평론가이자 난징대학 교수인 딩판(丁帆, 1952〜 )은 2001년에 문혁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촉구하며 ‘문혁학(文革學)’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역사청산과 반성을 촉구하는 이들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인지는 몰라도 1996년 광둥성(廣東省) 산터우(汕頭)에서 첫 삽을 뜬 이래 2005년에 ‘문혁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2016년 5월, 문혁 발발 50주년을 맞으면서 박물관 내 문혁 요소들이 소리 소문 없이 모두 제거됐다.

문혁에 대한 기억

문혁에 대한 기억의 상품화

과거의 기억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고, 치링허우(70後), 바링허우(80後), 심지어 주링허우(90後)가 대학생이 된 요즘, ‘문혁’이 얼마나 중국인들의 뇌리에 남아있는지 알 길이 없다. 상점의 진열장 안에 놓인 채로 향수를 달래주고 있는 『마오쩌둥어록(毛澤東語錄)』이나 홍위병 복장을 한 인형이 시장자유주의 경제시대의 한 풍속도를 대변하는가 하면, 중국을 암흑세계로 밀어 넣었던 문혁의 그림자가 50년이 지난 뒤에 다시금 드리워지고 있다. 정치적 보수화와 사회통제 강화, 경제적 양극화 심화가 문혁의 망령이 어슬렁거릴 공간을 열어 놓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혁에 대한 평가

중국의 정통적 문혁 평가는 문혁이 끝나고 5년이 지난 1981년 6월 27일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이루어졌다. 동 회의에서 채택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이하 「역사결의」로 약칭)가 그것이다. “실사구시적 방법으로 ‘문화대혁명’을 적절하게 평가”하고, 모택동의 “공과(功過)와 시비(是非)를 평가”함으로써 “(문혁의) 경험을 총괄하고 사상을 통일하며, 일치단결하여 앞을 내다보는 역할”하도록 하는 것이 이 결의의 목적이었다. 1년 남짓한 기간동안 약 4,000여명에 달하는 관련자들의 토론을 거쳐 준비된 「역사결의」는 문혁을 평가하는 중국의 정통적 입장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덩샤오핑(鄧小平) 이론 나아가 현재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가능케 한 역사적 대전환의 출발점이었다.

「역사결의」의 문혁 평가는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에 걸친 ‘문화대혁명’으로 당과 국가와 인민은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맛보았다”는 결론으로 시작된다. 지도자가 잘못 발동한 것으로 이론에서 실천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부정해야 할 대상이 문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문혁의 부정은 “현대화된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역사적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사회주의적 국민국가 건설’의 방향을 둘러싸고 이견을 보였던 중국공산당이 ‘무산계급독재 하 계속혁명론’에 근거한 균등 발전 전략에서 사회주의 현대화 노선에 입각한 불균등 발전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한 일종의 결택(決擇)이었다. 현 시점에서 볼 때 중국공산당의 그러한 결택은 일단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혁 종결 후 30년 동안 성취한 중국의 발전은 두 가지 상이한 문혁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첫째는 「역사결의」의 평가가 정당했다는 인식이다. 다음과 같은 문혁에 대한 현재의 일반적 이미지는 그러한 인식을 반영한다. 문혁은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초래한 ‘10년 동란’이었다. 홍위병으로 상징되는 반지성적 대중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핍박을 받았으며, 반문명적 행위로 인해 전통 문화 유산이 심각히 훼손되었고, 지식인들은 감내하기 어려운 수난을 당했다. 또한 국가의 행정체계와 공산당의 조직체계가 와해되어 무정부 상태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고, 경제도 파탄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강한 중국을 회복하고자 한 근․현대 100여년의 지난한 모색, 적어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성취한 발전을 수포로 돌리는 한편 중국의 고립과 낙후를 심화시켰다. 그러므로 문혁 10년은 중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문혁에 대한 이러한 통념은 문혁의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의 특정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이 왜곡 혹은 과장되기도 하고, ‘호겁(浩劫)’의 혼란이었다는 전체상에 묻혀, 때로는 이성의 모호성에 기대어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인 것처럼 이미지화된 측면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둘째, 최근의 발전은 오히려 문혁의 긍정적 재평가를 촉발시키는 원인을 제공한다. 문혁은 중국에서 발생했지만 문혁학은 외국에 있다고 할 정도로 서구 학계가 문혁 연구를 주도해 왔다. 서구 학계의 해석은 문혁을 권력투쟁으로 보는 견해, 사회주의 이상 사회 실현을 지향한 실패한 ‘문화혁명’으로 보는 견해, 권력 투쟁적 요소와 이상적 요소가 공존한다는 절충적 견해로 대별할 수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견해는 정도의 차는 있지만 문혁 발동의 근원적 의도에 주목하여 이를 긍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연구는 문혁을 권력투쟁으로 보는 또 하나의 주요한 연구 흐름을 비판하면서 모택동 스스로 자신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했던 ‘무산계급 독재 하 계속혁명론’이야 말로 문혁의 진정한 동기이자 문혁을 통해 성취하려 했던 이상적인 중국의 미래구상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연원이 깊을 뿐 아니라 외국 학계에서는 점차 확산되고 있다. “100년이 지난 후 사람들이 문혁을 연구할 때 아마도 권력투쟁의 일면보다는 문혁에서 체현되었던 마오주의의 이상적 청사진을 가장 주요한 것으로 볼 것”이라는 지적은 서구 학계의 현재의 경향을 함축적으로 말해 준다.

그런데 중국 내에서도 문혁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최근 가시화되고 있다. 신좌파의 문혁 인식이 대표적 사례이다. 일부에서는 신좌파의 주장에 대해 문혁을 숭상하고, 문혁에 관한 한 신화로 역사를 재구성하며, 이론으로 현실을 대체했다는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 사실 신좌파는 문혁의 대민주(大民主), 양참일개삼결합(兩參一改三結合), 경제적 민주,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강조함으로써 마오식 사회주의의 합리적 요소를 발굴할 것을 주장한다.

신좌파를 비롯한 긍정적 문혁 재평가는 두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학술사적으로는 전술한 서구학계의 좌파 문화혁명론자의 영향을 지적할 수 있다. 알뛰세와 제머슨 그리고 딜릭 등 네오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문화 비평이론이 신좌파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현재 중국의 현실과 미래 구상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정착된 현 시점은 마오가 문혁을 통해 혁파하려 했던 불평등과 관료주의가 매우 심화되어 지속가능한 강한 중국 건설을 질곡하기에 이르렀다. 「역사결의」에서 부정했던 균등 분배 지향의 발전전략으로 신중하게 방향 선회(和諧論=조화론)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결의」로부터 발원한 현재의 성취가 오히려 문혁을 재평가하는 자양분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문혁 40년이 지난 현 시점에도 그것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역사결의」로 정리되었던 ‘정통적 해석’의 공감대가 최근 들어 오히려 해체되는 양상이다.

한편 서구의 문혁 평가는 다양한 양상을 보이나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알뛰세는 중국의 문혁이야 말로 그 자신이 이론적으로 탐색하던 문제를 실천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모택동의 문화결정론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문혁 직후 알뛰세는 사회주의 국가의 운명은 의식형태 영역의 계급투쟁의 승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지만 70년대에 이르러 문혁이 여전히 계속되자 알뛰세는 중국 혁명을 ‘역사적 실천 중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스탈린 문제에 대한 좌익비평이라 보았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문혁을 평가한 것은 모택동의 문혁 이론과 그 자신의 후현대 신마르크스주의가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기초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논단을 수정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의 주장에서 그 전형적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자기의 이념, 신앙을 중시하는 사람은 事實을 대면하기 어렵다. 그들이 볼 때 모든 사람이 事實을 서술함에 선택성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敍述도 단지 사실에 대한 闡釋일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들과 史實과 事實에서부터 문혁 연구를 시작한 학자들 간의 대화가능성을 거의 없앤다. 국외와 중국 대륙에서 모두 이와 같다.”

미국의 네오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손(Fredric Jameson)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문혁을 분석, 평가하였다. 그는 역사 단계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생산방식에 의해 결정된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알뛰세와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重構한 네오마르크스주의였다. 또한 모택동의 문혁 이론의 영향도 있어 문화가 이미 생산방식을 界定하게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론은 새로운 역사단계에서 과거의 역사단계는 우월한 지위를 상실하지만 소실되지는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생산방식의 신구 교체 때는 과도기가 있는데, 이 시기에 각종 병존한 생산방식 간에 충돌이 발생하며, 그들 간의 모순이 정치, 사회, 역사 생활의 중심을 점한다. 이 과도기를 문화혁명이라 말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주장이었다. 그는 1960년대를 과도기에 해당하는 역사 시기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현대주의의 종언과 포스트모더니즘 흥기의 시기로 보았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이러한 세계적 구도의 한 부분일 뿐 아니라 그것의 축영이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문혁을 진정한 대중 민주사회가 탄생하려고 하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문화혁명은 피압박민족 혹은 혁명의식이 결여된 각 노동자계급에 대한 집체적 재교육이다”고 문혁을 높이 평가하였다. 나아가 그는 모택동의 문화이론(마오주의)가 60년대 모든 위대한 사상의식 형태 중에서 가장 풍부한 것이라고 격찬하였다. 또한 1984년 발표한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에서 신중국 미완성의 사회실험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다고 극찬했는데, 이 실험에서 인간은 집체로 만들어져 자기의 운명에 대해 새로운 파악이 있었고, 참신한 하나의 객체 세계를 창조했으며, 이미 집체는 새로운 역사주체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아리프 딜릭은 문혁에 대해 다음 두 관점에서 출발한다.

첫 번째는 세계자본주의의 시야에서 문혁을 인식한다. 그는 세계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두 개의 문화혁명이 있음을 제기하였다. 하나의 문화혁명은 자본주의 문화혁명이다. 이 문화혁명에서는 문화를 상품으로 바꾸고, 문화를 무한한 가소성(可塑性)과 가쇄성(可鎖性)을 갖게 했다. 이것이 소위 포스트모던 문화이다. 다른 하나의 문화혁명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다. 중국의 문화혁명에서 문화의 생산은 목적이 아니라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이다. 즉 문화라는 수단을 통해 군중을 교육하여 새로운 사회를 위해 사회주의 신인간을 소조(塑造)하여 신정권 자체의 관료주의에 대항하고, 이상적인 집단을 만든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문화혁명은 진정한 혁명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이미 전지구적 범위에서 포스트 모던 시대에 접어들어 마오주의를 만들어 낸 식민주의, 제국주의 시대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오늘 날의 각도에서 보자면 중국의 문혁은 한 시대를 올라가는 ‘잔천(殘喘)’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두 번째는 중국혁명사와 세계공산주의운동사 속의 문혁 인식이다. 이 시각은 모택동이 갖고 있던 관점인데, 딜릭은 다른 용어와 개념으로 모택동의 관점을 중복해서 드러내었다. 마오의 혁명이론과 사상 발전에 대한 딜릭의 해석은 문혁 이후 중공중앙 문건에 반영된 그것에 대한 해석보다도 훨씬 더 모택동의 관점에 접근해 있다. 역사결의에서는 모택동사상을 중공의 집체적 지혜와 경험의 결정물이라고 규정했으나 문혁을 지도한 ‘無産階級專政 下 계속혁명 이론’은 포괄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오는 이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누차에 걸쳐 강조하였다. 이것이 1971년 임표 사건으로 문혁이 파산이 드러난 후에도 문혁을 끝내지 않은 이유이며, 그 후 5년간의 정치운동 즉 비림비공과 수호지 평론을 통해 주은래를 影射하고, 우경번안을 방지했던 이유였다.

딜릭은 이점에서 모택동과 일치한다. 그는 문혁이론을 ‘문혁 마오주의’라 규정하고, 이것이 모택동 사상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모택동이 혁명가로서 혁명 성공 후 출현할 수밖에 없는 비급진화(de-radicalization) 경향을 저지하고, 경제주의(현대화 이론)에 대항했으며, 문화 영역의 계속혁명으로 사회주의의 진전을 지속하고자 했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중국에서 소련식 사회주의 관료 체제가 출현하는 것을 방지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모택동의 이러한 사상이 195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의 반스탈린과 중공 8대의 생산력 발전 강조에 대해 모택동의 불만이 그것이다. 이 점에서 딜릭은 이 해를 문혁의 진정한 기점으로 보고 있다. 딜릭이 보기에 문혁을 발동한 모택동의 사상은 모택동 사상 중에서도 마르크스주의를 초월한 부분으로 세계사적으로 가장 혁명적인 사상 형태였다.

위와 같은 딜릭의 견해는 알뛰세의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유사하다. 말하자면 딜릭의 관심은 문혁 평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파 세력 비판에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문혁이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비판적 태도로 그것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 뿐 아니라 아마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비판력을 회복하여 비판적 태도로 혁명 역사를 삭제하려는 우파의 획책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이 인식의 진정한 목표는 문혁이 아니고 혁명역사를 삭제하는 우파 세력이었다.

문혁에 대한 연구

문혁의 역사적 사실을 객관화하는 작업

‘문혁’은 역사, 사상철학, 사회, 문화, 문학예술 등 다방면에 흔적을 남겼다. ‘문혁’과 관련하여 많은 저작들이 출판되고는 있지만, ‘역사청산’ 문제와 관련한 자료의 수집, 발굴, 해석과 평가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연구 현황도 활발하다고 할 수 없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재난의 역사를 다루고 평가하는 일은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작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영어권에서 세계적인 평론가, 학자들이 문혁과 관련한 묵중한 연구저작을 출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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