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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는 공자, 살아있는 문화권력

통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공자 철학의 영속성

한대(漢代)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무제(武帝, BC140~87)가 유학을 국학으로 삼은 이래로 공자는 중국 철학의 사상적 원류이자 현재로 이어지는 동맥이었지만 툭하면 불려나와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공자는 난세의 영웅이자 희생양인 셈이었다. 공자 철학의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수난은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이고, 마지막(?) 박해는 ‘문혁’ 때일 것이다.

아편전쟁(阿片戰爭)으로 ‘약체(弱體)’를 절감한 청조(淸朝) 말기의 관료나 지식인들은 여전히 공자의 가르침(철학)을 신봉했다. 내면의 학문(‘中體’)인 공자 철학의 사상적 권위가 가장 크게 흔들린 것은 1919년 5‧4 시기이다. 이때 “공자를 타도하자!(打倒孔家店)”는 ‘계몽(啓蒙)’과 ‘구망(救亡)’이라는 시대적 요구 앞에서 절대명제였다. 공자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공공의 적으로써 중국의 몽매함을 부채질한 원흉으로 지목됐다. 전통 봉건철학과 윤리의 대표자인 공자는 사회주의 이념과 정치 시스템 속에서 더욱 숨을 쉴 수 없었고, ‘문혁’ 기간 비림비공운동 때에 또 다시 불려나왔다.

공자를 넘어서

공자 철학의 계승과 돌파

‘신유학(新儒學)’은 11,2세기에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장재(張載, 1020〜1077), 정호(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8) 등을 거치면서 송학(宋學), 이학(理學) 혹은 도학(道學)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를 주로 서양에서 ‘신유학’이라 일컫는다. 주희(朱熹, 1130〜1200)는 그 집대성자로서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불리게 됐고, 조선으로 건너와 성리학(性理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어떠한 사상이든 철학이든 시대마다 재해석되고 재생산되기 마련이므로 ‘새로움(新)’의 생명은 그리 길지 못하다. 근‧현대 전환기를 거치면서 ‘신유학’ 앞에는 ‘현대’라는 접두사가 붙게 됐다.

공자를 중심으로한 국학붐

공자의 사상을 활용한 중국의 통치 콘텐츠

공자는 1980년대 사상해방(思想解放)의 물결 속에서 이어진 ‘문화연구의 붐(文化熱, 혹은 文化大討論)’과 1990년대 말의 ‘국학 붐(國學熱)’ 속에서 ‘새로운’ 현대 철학의 위상을 정립했다. 여성철학자인 쑹사오펑(宋少鵬)은 중국이 시장화 개혁으로 인해 빈부 격차와 사회 문화 현상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공동의 역사적 기억과 문화 정체성을 경제적 분열을 접합할 수단으로 동원하면서 국학열, 특히 유학의 긍정성을 확산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루쉰이 광인의 입을 통해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했던 전통 윤리의 대명사인 공자와 그의 철학이 바야흐로 ‘거대한 중국’에 대한 중국인의 열망에 부응했다고 해야 할까?

세계 공자학원

공자의 세계화 프로젝트와 중국의 공공외교의 결정판

20세기의 영욕을 뒤로 한 성인(聖人) 공자는 21세기에 들어서자 시류(時流)를 따르기 시작했다. 원래 유가 사상이 현실을 지향하고 입세(入世)의 덕(德)을 지닌 까닭에 중국과 중국인을 위하여 산업계의 전사로 거듭 태어났다.

자본의 옷을 입은 대표적인 예가 공자의 이름을 상표로 삼은 (철학, 사상, 대학, 교육, 언어, 문화…… 등 영역으로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거상(巨商) ‘공자학원(孔子學院)’이다. 경제성장이 세계적인 ‘중국어학습 열풍(漢語熱)’을 일으킨 것이다. 2007년 4월에 베이징 세워진 공자학원본부는 중국의 언어문화를 통한 외교가 전략적 단계에 들어섰음을 상징한다.

공자가 남긴 햇빛과 그늘

공자에 대한 평가

공자(孔子)와 유학(儒学)의 역사상 첫 번째 수난은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书坑儒)’이고, 마지막(?) 필화사건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시기일 것이다. 한대(汉代)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무제(武帝, 기원전 140년-기원전 87년 재위)가 유학을 국학(国学)으로 삼은 이래로 공자는 중국 철학의 사상적 원류이자 현재로 이어지는 동맥이었지만 때로는 불려 나와 수모를 당했다. 실제보다 과장된 혐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공자는 난세의 영웅이자 희생양인 셈이었다.

현대 중국에서 공자 철학의 권위가 가장 크게 흔들린 것은 1919년 5‧4 시기이다. 이때 “공자를 타도하자!(打倒孔家店!)”는(陈伯达, 〈再论新啓蒙运动〉; 马克锋, 〈“打孔家店”与“打倒孔家店”辨析〉; 陈亮, 《中国靑年与百年思潮》) ‘계몽(啓蒙)’과 ‘구망(救亡)’이라는 시대의 요구에 직면해(罗岗, 〈“五四”: 不断重临的起点——重识李泽厚《啓蒙与救亡的双重变奏》; 李泽厚, 《中国现代思想史论》) 절대명제였다. 공자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공공의 적으로써 중국의 약체를 부채질한 원흉이었다. 전통 봉건철학과 윤리의 대표자인 공자와 그의 사상 철학은 사회주의 이념과 정체체제 속에서 더욱 숨을 쉴 수 없었고,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질식할 지경이었다.(杨荣国, 〈孔子——顽固地维护奴隶制的思想家〉; 江青 등, 《林彪与孔孟之道》) 1974년 1월 18일, 산둥(山东) 취푸(曲阜) 공묘(孔庙) 대성전(大成殿) 앞에서 전개한 ‘비림비공대회(批林批孔大会)’를 시작으로 공자 관련 유적은 중국 전역에서 거의 초토화되었다. 공자의 악행을 폭로하고 비판을 교육하는 어린이용 그림책인 연환화(连环画)가 1974년에 광시(广西)의 《공씨 둘째아들전(孔老二小传)》 등 46권, 1975년에 허베이(河北)의 《서문표(西门豹)》 등 38권, 1976년에 지린(吉林)의 《공씨 집을 불사르다(火烧孔家店)》 등 14권이 발행된 것만 보아도 수난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공자는 1980년대 사상해방의 물결 속에서 전개된 ‘문화연구의 열풍(文化热, 文化大讨论)’과 1990년대 말의 ‘국학열풍(国学热)’ 속에서 ‘새’ 현대 철학의 위상을 정립했다.(张旭东, 〈“文化热”的主要流派〉; 张小平, 〈文化領域的“国学热”现象分析〉; 조봉래, 〈中国 마르크스주의와 儒家思想의 关係变化: ‘儒法鬪争’에서 ‘国学热’로〉) 여성철학자인 쑹사오펑(宋少鹏)은 중국이 시장화 개혁으로 인해 빈부 격차와 사회 문화 현상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공동의 역사적 기억과 문화 정체성을 경제적 분열을 접합할 수단으로 동원하면서 국학열풍, 특히 유학의 긍정성을 확산하고 있다고 분석한다.(김영옥‧김현미‧양민석‧윤혜린‧정진주, 《국경을 넘는 아시아 여성들: 다문화 사회를 만들다》) 21세기에 들어서자 공자는 중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자본의 옷을 입고 외유에 나섰다. 산업계의 전사로 거듭 태어나 세계시장에 뛰어든 대표적인 예가 ‘공자학원(孔子学院)’이다. 2007년 4월에 베이징 세워진 공자학원본부는 중국의 언어문화를 통한 외교가 전략적 단계에 들어섰음을 상징한다.(戴蓉, 〈孔子学院的成立背景〉; 莲大祥, 〈孔子学院的经贸效果〉; 차미경, 〈중국문화원 ‘공자학원’의 설립과 중국문화의 세계화 전략〉) 공자의 현대적 위상은 2008년의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도 나타났다. 장이머우(张艺谋, 1950- ) 감독은 공자와 제자 3천 명이 대나무 책을 들고 행진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2010년 1월 22일에 중국 전역에서 영화 〈공자〉를 개봉했다.(朴胜俊, 〈孔子를 되살려낸 중국 공산당: 비림비공(批林批孔)에서 영화 〈공자〉까지〉) 〈아바타〉의 영향을 받아서 첫 주말의 매표수익은 2800만 위안(元)에 불과했지만, 둘째 주부터 역전되어 세 번째 주에는 1억 위안을 돌파했다고 한다. 또 2011년 벽두에 거대한 공자상(像)이 천안문광장 앞에 나왔다가 (마오쩌둥 초상화를 가린다는 이유로) 100일 만에 옮겨졌다. 이는 ‘하나의 중국(一个中国)’을 향한 21세기 중국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오늘을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사상적 철학적 구심점을 잃게 했다는 자기반성의 절실함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여전히 공자와 유학은 ‘폐기처분’할 것이 아니라 쓸모 있게 다듬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엿보게 한다.

서양에 공자를 전한 최초의 인물은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이며, 그는 《중국선교사》에서 공자를 중국의 위대한 철학자로 소개했다.(신진호‧전미경 역, 《마테오 리치 중국 선교사》; 타이완 역본 《중국선교사(中国传教史)》; 중화서국 출판, 何高济‧王遵仲‧李申 역, 《마테오 리치 중국 찰기(利玛窦中国札记)》) 독일의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공자를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평가했고,(赵建华, 《진실한 공자(真实的孔子)》) 18세기에 서양 학자들은 공자를 ‘완벽한 사람(完人)’으로 이해했다고 한다.(张勇, 〈볼테르가 공자를 말하다(伏尔泰说孔子)〉)

중국에서의 공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하늘이 내려준 성인(《孟子·公孙丑上》)이자 최고의 성인(《史记·孔子世家》)이었고, 동중서가 국학으로 높이면서 거의 유일한 정통(正统)이었으며, 공자의 출생, 외모, 행적 등을 신격화(《春秋纬·演孔图》, 《孝经援神契》, 《古微书》卷二十五)하는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는 공자가 노자(老子)에게 예를 물었던 전고(典故)에서 비롯된 과소평가(《史记‧老子列传》, 《庄子‧德充符》, 《列子‧汤问》), 《대학(大学)》과 《중용(中庸)》 등 유학 경전 해석의 경직화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청나라 말기에 강유웨이(康有为)가 무술변법(戊戌变法)을 주장하며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춘추필삭대의미언고서(春秋笔削大义微言考序)》 등에서 공자를 유신파(维新派)로 만들었다면, 현대 사회로 진입한 뒤에는 중국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고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요구에 의해(김승욱, 〈공자 비판의 정치학: 비림비공의 경우〉; 이병한, 〈중국대륙에 불고 있는 ‘공자의 재림’〉) 희화화되고 왜곡되었다.

한국에서의 공자

한국에서의 공자의 영향

한국에서는 공자와 유학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해왔다.(신봉승, 《문묘 18현-조선 선비의 거울》) 한국의 ‘문묘18현(文庙十八贤, 东方十八贤)’은 신라 성덕왕 16년, 717년에 당나라 조정에 들어갔던 왕자 김수충(金守忠)이 귀국하여 바친 ‘공자’, ‘10철’, ‘72제자’의 화상을 국학에 안치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선현(先贤)인 신라의 2현 설총(薛聪), 최치원(崔致远), 고려 2현 안유(安裕, 안향), 정몽주(郑梦周), 그리고 조선 14현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郑汝昌), 조광조(赵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浑), 김장생(金长生), 조헌(赵宪), 김집(金集), 송시열(宋时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등 18현의 위패를 문묘에 봉안하고 제향해 왔다. 조선(朝鲜)의 ‘3대 논쟁’이라고 하는 사단칠정논쟁, 호락논쟁, 예송논쟁 등은 모두 인간의 본성과 도리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발단된 것이지,(황준연, 《한국유학 3대 논쟁 연구》; 杨祖汉, 《당대 유학의 관점에서 본 한국 유학의 중요 논쟁 속편(从当代儒学观点看韩国儒学的重要論争续编)》) 공자와 유학을 부정하고 위상을 뒤흔든 것이 아니었다.

2001년에 김경일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한국 사회가 유교문화에 얽매이고 있으며 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안했는데, 중국에서는 후스(胡适)가 《중국철학사대강(中国哲学史大纲)》에서 중국 철학 연구에 실용주의적 관점과 방법론을 적용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경용의 〈중국 1980·90년대 문화논쟁의 ‘인문정신’과 孔子 위상〉, 정보은의 〈현대중국 “국학열(国学热)”의 사회체계형성으로서의 사회적 기능과 의미〉, 전명의 〈儒学的危机与復兴: 論纲 = 儒学의 危机와 復兴〉, 김수영의 〈개혁개방이후 중국 국가이데올로기 형성과 대학의 역할: ‘국학’ 담론을 중심으로〉, 양승무의 〈中国 儒学復兴运动의 发展과 展望〉, 김현우의 〈中国의 儒敎观 硏究(1949~1978): 《中国哲学史》 중 儒敎 관련 기술을 중심으로〉 등의 단편논문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현대중국의 모색》, 김기봉의 《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 김병채, 강진석, 김태용의 공저 《현대신유학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권기영의 《마르크스와 공자의 화해: 21세기 중국은 왜 이 길을 선택했나》와 중국의 류슈밍(刘修明)의 《유생과 국운(儒生与国运)》 등의 저술을 통해서 보면 현대 중국의 전통문화의 접근 차원에서 ‘유학부흥론(儒学復兴论)’이 타이완, 홍콩, 미국 등지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학자들의 입장에서 그 특수성과 장점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유학의 가족주의, 성실성, 교육 방면에서의 유용성에 주목해 현대적인 재해석을 강조한다면, 비판계승론(批判继承论)의 입장에서 중국의 대다수 학자들은 계승하되 서양문화 속의 좋은 점을 (선별적) 수용하고 중국문화의 장점에 기반을 둔 중국적인 사회주의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자와 유학이 지닌 인의예지(仁义礼智)의 사유, 수양, 수행 나아가 군자(君子)의 덕목과 치국(治国)의 도, 인격 도야와 완성 등은 모두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담은 것이며 현대인에게도 유용하다. 무엇이든 독단에 빠지거나 지나친 권위를 가질 때에 본질과 다른 역효과를 낼 것이다.

공자의 부활

세계적 문화상품으로서 공자의 부활

공자의 화려한 부활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도 보여주었다. ‘중국 것’을 서양인의 오락거리로 만들었다고 비난받았던 장이머우(張藝謀, 1950〜 ) 감독은 공자와 제자 3천 명이 대나무 책을 들고 행진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했고, 2010년에 개봉한 영화 〈공자〉는 미국산 영화 〈아바타〉에 맞서 중국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해서 논란거리가 됐다. 2011년 신년 벽두에 9.5m 높이의 거대한 공자상(像)이 톈안먼광장 앞에 우뚝 섰다. 비록 100일 만에 옮겨지기는 했지만, 이는 ‘하나의 중국(一個中國)’을 향한 21세기 중국의 비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 실시 뒤의 역사적 경험이 오늘을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사상적 철학적 구심점을 잃게 했다는 자성의 목소리(절실함)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여전히 공자의 사상과 철학은 ‘폐기처분’할 것이 아니라 쓸모 있게 다듬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갖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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